
신륵사와 나옹선사 이야기
조사당(祖師堂)을 거쳐 절 뒤편 보제존자(菩提尊者_ 나옹선사) 석종부도(石鐘浮屠)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다른 부도 둘을 만났다.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圓球形石造浮屠)와 팔각원당형석조부도(八角圓堂形石造浮屠)이다.
보물 제180호 - 신륵사 조사당 (神勒寺 組師堂)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 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63년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
보제존자 석종부도.(普濟尊者 石鐘浮屠).****
나옹화상의 승탑은 절의 서북쪽 언덕 위에 있었다. 보제존자(普濟尊者)는 1371년(공민왕 18)에 왕사(王師)가 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호이다.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부도는 규모가 작고 화려함이 덜하지만 통도사나 금산사의 금강계단을 연상시킨다.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노력한 나옹의 업적이 반영된 것이리라.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鐘)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가 솟아 있다.
이색과 나옹, 두분이 태어난 곳은 경북 영덕이고 죽은 곳은 여주 여강이다.
보제존자 석종비.(石鐘碑, 보물 제229호).
탑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라 한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나옹과 이색은 서로 특별한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원나라 유학을 다녀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민왕과의 돈독한 친분을 가졌으며 당대의 선각자로 촉망 받았다
그러나 생전에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에도 이색은 나옹을 찾지 않았다. 입적했을 때도 왕명에 따라 그의 사리석종기(舍利石鐘記)를 썼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길이 다르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랐던 것이다. 불가와 유가는 확연히 다른 길이었다.
나옹은 우왕과 집권세력의 견제로 먼 길을 떠나다 병을 얻어 신륵사 강월헌에서 세상을 떠났고, 나옹의 사리석종기를 쓴 이색은 강월헌에서 멀지 않은 연자탄(燕子灘_ 제비여울)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태조가 보낸 독배를 마시고 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옹이 죽은 지 20년 뒤이다.
둘이 태어난 곳도 영덕이고 죽은 곳도 여주 여강(驪江)이다. 그래서 영덕 장육사에 가면 나옹선사의 기념관이 있고 이색의 기념관은 영해 괴시리 마을 뒷산에 있다.
※ 여강(驪江)_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
보제존자 석등(보물 제231호).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火舍石)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다층 전탑, **
신륵사에 새로운 이름을 신륵사 다층석탑 신륵사는 ‘벽절’이라고도 불렸다고 하였던 것은 벽돌로 만들어진 저 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탑(塼塔)은 점토로 벽돌 모양을 만든 다음 뜨거운 가마에 구워낸 후 한층 한층 쌓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석탑이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반면 전탑은 일부지역에만 세워졌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만드는 것도 복잡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 신륵사에 있는 이 다층전탑이다. 이 탑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부러 절의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하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전탑으로 높이 9.4m이며 보물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해 7개의 층단을 만들고,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꾸몄다.
대장각기비 (보물 제230호).
다층전탑 근처에 비각 하나가 있다. 비석은 크게 파손되어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라 전문의 판독은 불가하다고 한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장방형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간단하게 변화된 모양인데, 비신(碑身)의 보호를 위하여 양쪽에 돌기둥을 붙여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 같은 모양은 이후 조선시대 석비 조형의 한 형식이 되었다는데, 전에 합천 삼가에서 살펴 보았던 남명 선생의 부친 조언형(曺彦亨)의 묘갈이 떠오르게 한다.
원래 신륵사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서쪽 언덕에 대장각(大藏閣)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여·수장하던 곳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이색은 선왕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였다. 비문은 해서(楷書)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이다. 달은 부처이고 강은 중생이다.
신륵사 강월헌(江月軒).****


강월헌(江月軒)이 삼층석탑과 함께 남한강변의 가파른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대(東臺)라고 불려지는 거대한 암반이다. 문객들이 달밤에 동대에 올라 여강에 비친 달을 보며 시를 읊으며 풍유를 즐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명승지였던 모양이다.
이색(李穡)이 시를 썼고, 권근(權近) 역시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이식(李植), 김창협(金昌協), 정두경(鄭斗卿) 외에도 다산 정약용도 동대에 올라 시를 썼다고 한다. 현재의 강월헌이 있는 자리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선사 혜근(惠勤)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강월헌이라고 당호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깨달음을 얻고 주지로 있었던 양주 회암사(檜巖寺)의 처소이기도 하다.
본래의 누각은 혜근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3층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년 3층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다시 지었다고 한다.
나옹화상이 신륵사에 입적하게 된 이유가 특별하다. 나옹은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왕사로 추대됐다가 밀성군(密城郡_ 현 경남 밀양)으로 내쳐졌다. 그때 나옹은 회암사(檜巖寺)의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문수회(文隨會)를 베풀었다. 중앙과 지방의 남녀 노소, 귀한 사람 천한 사람 가릴 것 없이 구름 같이 몰려 포백과 과실 떡을 보시했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는 우왕과 우왕을 둘러싼 집권세력에게 위협이 됐다. 유생들은 과도한 토목공사라며 나옹을 탄핵했다. 왕은 선사를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내쳤다. 그가 떠나면 신도들이 잠잠해질 것이라 기대햐였을 것이다. 그러나 쫓겨나는 나옹을 보면서 백성들은 통곡했다.
나옹은 길에서 병을 얻었고, 한강에 이르러자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배를 타고 이레만에 신륵사에 도착했으나, 1376년 5월 15일 열반하였다. 세속 57세, 법납으로 37세였다.
강월헌에 오르니 남한강의 청량한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서로 어루러져 절로 감회에 젖어 만든다. 여주 사람들은 신륵사 앞을 가로 질러 여주를 관통하는 저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 부른다고 한다.
첫 구절이 입에 맴도는 나옹선사의 시 한 편을 옮겨 본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로타리 불자회 지도법사 보명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