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벽화이야기 - 문수보살과 세조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1417~1467)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12살에 왕위를 잇는 혼란기에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좌에 앉았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피바람을 일으키고 왕이 된 것이다.
세조는 비록 쿠데타로 왕위에 등극했지만 1445년부터 옥좌를 지키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권을 강화한 것은 물론이고 국방력의 강화와 호적제도 개선 및 보완, 각종 세제의 효율적인 개편 등은 조선 초기 괄목할만한 정책적 변화였다. 무엇보다 세조는 인문학 분야에 많은 공을 들여 역사서와 법전, 불경 등의 편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불교관련 설화나 야사, 사찰 창건설화 등에 세조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강원도 진부의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유명하다. 신라 말의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를 하고 고국의 문수보살 상주도량을 찾아 왔던 곳으로, 이때부터 오대산은 문수도량으로 불리고 있다.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한 상원사는 오대산 문수신앙의 중심이다.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와 중대를 지나 적멸보궁에 이르게 되는데, 상원사 초입에 ‘관대걸이’라는 버섯 모양의 석상이 서 있다.
관대걸이란 이름 그대로 갓과 옷, 그리고 허리띠를 걸어둔 곳이란 의미다. 상원사 오르는 길에 관대걸이가 서 있게 된 것은 세조의 행차로 인해서이다. 세조는 불심이 깊은 왕이었다. 그래서 사찰 찾아가길 즐겼고 불경 간행에 힘썼다. 혹자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왕이 되어서 그것을 참회하느라 불교에 의지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아무튼 세조가 상원사를 방문했을 때 그의 등에는 종기가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즉위 10년 째 되던 해에 세조는 등창을 심하게 앓게 되어 괴로웠는데 신미대사의 권유로 오대산에 기도를 하러 왔다고 한다. 세조가 오대산을 찾아 온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이때 등에 등창 내지는 종기로 고통을 받았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 세조와 문수동자 이야기를 담고 있는 김천 금강사 대웅보전의 벽화.
오대산에 온 세조는 오대천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싶었다. 그러나 종기가 난 몸을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혼자 물에 몸을 담갔다. 세조는 마침 지나가는 동자를 불러 등을 닦게 했다. 그런데 등에 동자의 손이 닿자 종기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조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동자에게 근엄하게 타일렀다.
“너는 왕의 몸을 만졌다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등 뒤에 있던 동자도 한 마디 했다.
“왕께서도 문수동자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시면 안 됩니다.”
세조는 순간적으로 놀라 뒤를 돌아보았으나 동자는 보이지 않았고 등의 종기는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기묘한 영험을 겪은 세조는 화공에게 자신이 보았던 문수동자의 모습을 설명해 주어 그림으로 그리게 했고, 그 그림을 보고 문수동자상을 조성하게 하여 상원사에 모셨다. 오늘날 상원사에 전하는 문수동자상이 그것으로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도 귀국한 뒤로 친견하지 못했다는 문수동자를 세조가 친견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피바람을 일으키며 등극한 왕의 핸디캡을 사찰의 설화들로 정당화 시킬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전국의 사찰에는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지 않다. 거칠게 드러나는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을 모티브로 하여 신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불교신앙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찰과 관련된, 혹은 불교와 관련된 많은 설화들이 중생교화의 목적을 두고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수동자를 친견한 세조의 이야기 역시 지극하게 귀의한 왕의 신심에 문수보살이 응신으로 나타나 병고를 치유해 주었다는 사실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밝혀 불법(佛法)에 의지하고자 하면 그 즉시 성불의 인연으로 통한다는 것이 대승보살의 가르침이 아닌가?
많은 천태사찰에도 세조와 문수동자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벽화가 있다.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 어디든지 문수보살이 나타나 지혜를 준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