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벽화이야기 - 고령선사
촌철살인으로 스승의 깨침 독려
벽화 속 불교 이야기 ⑤ 고령선사.
촌철살인으로 스승의 깨침 독려
▲ 서울 삼룡사 법화삼매당의 벽화. 형상적인 것, 유위에 집착해 있는 스승에게 무위의 무한한 자유를 일깨워 준 고령 선사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나무물통에 담긴 뜨거운 목욕물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물통 속에는 알몸의 스님이 앉아 있고 그 뒤에서 가사를 수한 제자가 등을 밀고 있다. 욕조 속 스님의 머리는 흰색으로 그려졌고 등을 미는 제자의 머리는 푸른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서울 삼룡사 법화삼매당 입구에 들어서서 몸을 뒤로 돌려 벽을 보면 여러 장면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스님의 목욕 장면이다. 목욕하는 스승의 등을 밀어주는 제자가 가사를 수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또 스승과 제자의 삭발한 머리를 흰색과 푸른색으로 확연히 다르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벽화의 내용은 당나라 때의 고승 고령신찬(古靈神贊) 선사와 그의 스승 계현(戒賢) 선사의 이야기다. 이 벽화와 관련된 일화는 〈직지심경〉에 전한다.
고령 선사는 복주의 대중사로 출가 했는데, 스승을 떠나 행각을 했다. 백장(百杖) 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 만행을 하다가 스승이 계시는 대중사로 돌아갔다. 하루는 스승이 목욕을 하며 등을 밀어 달라고 했다. 고령 선사는 스승의 등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好箇佛殿 而佛無靈)”
생뚱맞은 제자의 말에 스승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제자는 또 한 마디 던진다. 얼음장 같은 한 마디, 촌철살인의 한 마디였다.
“비록 영험 없는 부처일지라도 방광은 하는구나!(佛雖無靈 亦能放光)”
참으로 버릇없이 비꼬는 말이 아닌가? 스승의 벗은 몸을 보고 ‘몸집은 좋은데 속에 든 것이 없다’고 놀리고 나서 돌아보는 스승에게 ‘속은 비었으면서 반응할 줄은 아네?’ 하고 희롱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스승은 그게 뭔 말인지 잘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정말, 몸뚱이만 그럴 듯 하고 아무 생각이 없는 목석같은 스승인가 보다.
이 버릇없는 제자의 스승 놀리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스승이 창가에 앉아 경전을 읽고 있었다. 마침 벌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창호지에 자꾸만 몸을 부닥치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넓은데 마땅히 나가지 않고 저렇게 낡은 종이만 뚫으려고 하니 어쩌자는 것인가?(世界與廣闊 不肯出 鑽他古紙作作)”
그때서야 스승은 제자가 스승을 희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일깨움을 주려고 하는 줄을 알게 됐다. 며칠 전에는 몸뚱이만 비대한 자신을 꾸짖었고 지금은 책벌레처럼 경전이나 파고 있는 자신을 나무라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버릇없는 소리는 버릇없는 소리가 아니라 깨침을 독려하는 절실한 친절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네가 다르구나.”
스승은 종을 쳐서 대중들을 모았다. 고령 선사를 법상에 앉게 하고 자신은 제자의 예를 갖추어 법을 청했다. 물론 그날 고령 선사의 법문으로 스승의 마음은 밝아졌다.
깨침에는 신분도 나이도 빈부귀천도 없다.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런 허울들을 다 버려야 한다. 제자는 스승을 가르치고, 스승은 제자를 스승으로 여기는 가풍이 아름답지 않는가?
자, 이제 다시 벽화를 보자. 때밀이를 하는 제자가 가사를 수하고 있는 이유는 이미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사는 법의 상징이다. 그리고 제자의 머리를 푸른색으로 칠한 것도 이미 불과를 증득해 한없는 자비심으로 중생 제도에 나선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푸른색은 신성(神性)과 성실, 책임 등을 나타내고 방위로는 동쪽에 해당된다.
그나저나 스승을 법당 바닥에 앉히고 법상에 오른 고령 선사는 무슨 법문을 했을까? 귀를 열고 잘 들어 보라.
“신령한 광명이 홀로 빛나서 육근과 육진을 멀리 벗어났네. 심체가 참되고 향상함을 드러내니 문자에 구애되지 않았도다. 심성은 더러움이 없이 본래 저절로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 다만 망령된 인연만 벗어난다면 곧 여여한 부처로다.”
